“안 된다. 절대 못 보낸다. 고아원에도, 아들없는 집에도, 나는 못 보낸다. 죽은 내 아들
불쌍해서 이것들 못 보낸다. 니들 헌티 10원 한푼 도와달라구 안 헐라니까 보내지 마라. 그냥 내가 키우게 놔둬라.”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목 놓아 우셨습니다.
그날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도, 제 남동생도
없었겠지요.
할머니의 눈물이 지금의 저희 남매를 있게 해준 것입니다.
고아원에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아들 없는 집에 보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저희 남매는 할머니께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를 입은 것인데
그게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철이 들 무렵이 되어서야 그것을
알았습니다.
할머니는 친척들께 약속하신대로 10원 한 푼 받지 않고 저희 남매를 기르셨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남의 집으로 일을 다니시며 받아오신 품삯으로 생활을 꾸려가셨습니다.
할머니가 저희 남매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셔야 했는지, 스스로 얼마나 억척스러워 지셔야 했는지, 그때는 너무 어려서 몰랐습니다.
그저 배부르게 먹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고, 새 옷 한 벌없이 남의 옷만 얻어 입는 것이 불만이었고, 다른
아이들처럼 학용품을 넉넉하게 쓰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고, 마음 놓고 과자 한번 사 먹을 수 없는 것이
불만이었고, 소풍에 돈 한푼 가져갈 수 없는 것이 불만이 었고, 운동회 때 할머니랑 함께 달리는 것이
불만이었고, 할머니 밑에서 자란다는 이유만으로 동네에서나 학교에서나 불쌍한 아이 취급받는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배부르게 먹이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새 옷 한벌 사주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렸을지, 남의 집으로 옷을 얻으러 다니며 할머니가 얼마나 고개를 숙이셨을지, 넉넉하게 학용품을 사 주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어땠을지, 소풍간다고 김밥 한번 싸주지 못하고 용돈 한 푼 주지 못하는 그 마음이
어땠을지, 다른 아이들은 운동회 때 엄마와 함께 하는 것을 나이 드신 당신 몸으로 해 주시느라 얼마나 진땀을 빼셨을지,
어디서나 애비 에미 없다고 손가락 질 받는 손자들을 보며 얼마나 가슴 을 쓸어 내리셨을지, 그때는 철이 없어서 몰랐습니다.
그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조금이라도 더 불쌍하게 보여서 뭐 하나 더 얻으려고 애쓰는 할머니의
모습이 싫고 창피할 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저희 남매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사셨습니다.
당신의
체면이나 얼굴을 모두 버리시고, 오로지 저희 남매를 위해 사셨습니다.
앉았다 하면 신세 한탄이 먼저
나오고, 불쌍한 손자들 얘기를 풀어 놓으며 눈물을 훔치시기 바빴지만, 할머니가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과자 한
봉지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고, 이발소에서 공짜로 머리를 자를 수도 있었고, 새 연필 한 자루라도 얻어 쓸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철없는 남매를 기르시면서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누구보다
억척스럽고 강하셨지만, 또 누구보다 여리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남의 집으로 일을 가시는 날에는
새참으로 나온 빵을 드시지 않고 집으로 가져오시는 분이셨고, 1주일에 한번 장으로 나물을 팔러 가시는 날에는
순대를 한 봉지씩 사다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동생과 제가 싸우면 뒤란에 있던 탱자나무 가지로 심하게
종아리를 치셨지만, 붉은 줄이 그어진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시며 금세 눈물을 훔치시는 분이셨고, 맛있는 과자를 마음껏 못
사줘 미안하다며 문주를 부쳐주시고, 개떡을 쪄주시고, 가마솥 누룽지에 설탕을 발라주시는 분이셨고,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에는 우산 대신 고추밭 씌우는 비닐로 온 몸을 둘러주시고 빨래집게로 여기저기 집어주시며, 학교에
가서 다른 아이들이 너는 우산도 없느냐고 놀리거든,
“우리 할머니가 이렇게 돌돌 싸매면 비가 한 방울도 못
들어와서 옷이 안 젖는다더라. 너도 니네 엄마한테 나처럼 해달라고 해봐.”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시던 분이셨습니다.
비록 가난해서 봄이면 나물을 뜯어 다 장에 내다 팔고, 여름이면 고기를 잡아다 어죽집에 팔고, 가을이면
도토리를 따다 묵집에 팔고, 겨울에는 손에 마늘 독이 베이도록 마늘을 까서 돈을 벌어야 했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와 함께 했던 유년의 시간들이 스물 아홉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때는 그게 행복이라는
걸 몰라서 할머니 가슴을 많이도 아프게 했지요.
저는 가난이 싫었습니다.
억척스러운 할머니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반항적이었고,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는 제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고 제 마음을 조금도
이해해 주지 않는 할머니가 미워서 버릇 없이 굴기도 했습니다.
할머니가 부끄럽다는 생각은 했으면서도, 고생하시는
할머니가 불쌍하거나 안쓰럽다고 생각해 본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할머니를 생각하며 몰래 눈물을 훔쳐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몰랐습니다. 할머니가 제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사춘기의 저를 이해 못했던 것이 아니라, 현실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 우리 남매가 아니었다면 혼자 편하게
사셨을 할머니가 손자들을 떠맡은 죄로 불쌍하게 사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철이 들 무렵에야 알았습니다.
저와 남동생은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각각 천안에 있는 상고와 예산에 있는 인문고등학교에 진학해 자취 생활을
했습니다.
저희 남매는 주말마다 할머니가 계시는 집으로 내려갔는데, 그때마다 냉장고를 열어보면 그 안에
빵과 우유가 가득했습니다.
남의 집으로 일을 다니셨던 할머니가 새참으로 나온 빵과 우유를 드시지 않고 집으로
가져오셔서 냉장고에 넣어놓으신 거였습니다.
남들 다 새참 먹을 때 같이 드시지 왜 이걸 냉장고에 넣어
놓으셨냐고, 유통기한 다 지나서 먹지도 못하는데 왜 그러셨냐고 화를 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