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영민,「볍씨 말리는 길」 | |
볍씨 말리는 길 고 영 민(낭송: 고영민) 집 밖을 나섰습니다. 검은 아스팔트 위에 노랗게 펴 말린 볍씨들이 가지런합니다. 햇살에선 오래 된 볏짚 냄새가 풍기고 마을은 이제 편하게 쉬고 있습니다. 참 오랜만의 휴식입니다. 이런 날은 길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발소리를 죽이며 걷는 이 길,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선 볍씨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누런 볍씨 속에 들어 있는 흰쌀, 영혼들, 나는 문득 저 길의 끝, 일년 내내 못물에 발목을 적시며 준비한 정갈한 저녁 밥상을 떠올립니다. 텅 빈 무논 한가운데 흰 백로가 허리를 구부려 마음 자락에 떨어진 이삭 하나를 줍습니다. 이 역시 소담하게 차려진 한 그릇의 쌀밥입니다. 그림자를 길게 펼쳐놓고 출출한 햇살 한 줄기가 볍씨 하나하나를 오랫동안 어루만집니다. 나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 널어놓은 볍씨를 가래로 몰아 챙깁니다, 곧 이슬이 내릴 시간, 볍씨들은 노란껍질을 여미고 하루 종일 데운 제 몸으로 저녁의 입구를 향해 걸어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대숲을 향해 새 떼의 고삐를 쥐고 가는 노곤한 서녘 하늘은 텅 비어 어둡고 이슥토록 노을 한 자락은 허기진 산을 채 넘지 못해, 너머엔 아직 길이 환합니다. – 고영민 시집 『악어』, 실천문학사(예술위원회 선정 2005년 4분기 우수문학도서) 길 위 널어놓은 볍씨들이 가을볕에 잘 마르고 있습니다. 그 볍씨 속에 들어 있는 흰쌀, 우리 앞에 놓이는 정갈한 저녁 밥상과 흰 쌀밥 한 그릇도 일년 내내 못물에 발목을 적시며 준비한 것임을 생각합니다. 씨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일의 숭고함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 일의 순간순간에서 마지막까지 경건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가을 저녁 길이 환합니다. 문학집배원 도종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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