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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민,「볍씨 말리는 길」

신데렐라임 2018. 4. 4. 10:47

                                                                         




고영민,「볍씨 말리는 길」



볍씨 말리는 길
고 영 민(낭송: 고영민)

집 밖을 나섰습니다.

검은 아스팔트 위에
노랗게 펴 말린 볍씨들이 가지런합니다.

햇살에선
오래 된 볏짚 냄새가 풍기고

마을은
이제 편하게 쉬고 있습니다.

참 오랜만의 휴식입니다.

이런 날은
길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발소리를 죽이며 걷는 이 길,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선 볍씨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누런
볍씨 속에 들어 있는 흰쌀,

영혼들,
나는 문득 저 길의 끝,

일년 내내 못물에
발목을 적시며 준비한

정갈한
저녁 밥상을 떠올립니다.

텅 빈 무논 한가운데
흰 백로가 허리를 구부려

마음 자락에
떨어진 이삭 하나를 줍습니다.

이 역시
소담하게 차려진 한 그릇의 쌀밥입니다.

그림자를 길게 펼쳐놓고
출출한 햇살 한 줄기가

볍씨 하나하나를
오랫동안 어루만집니다.

나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

널어놓은 볍씨를
가래로 몰아 챙깁니다,

곧 이슬이 내릴 시간,

볍씨들은
노란껍질을 여미고

하루 종일 데운
제 몸으로 저녁의 입구를 향해

걸어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대숲을 향해
새 떼의 고삐를 쥐고 가는

노곤한 서녘 하늘은
텅 비어 어둡고
이슥토록 노을 한 자락은

허기진 산을
채 넘지 못해,

너머엔
아직 길이 환합니다.

– 고영민 시집 『악어』,
실천문학사(예술위원회 선정 2005년 4분기 우수문학도서)



길 위 널어놓은 볍씨들이
가을볕에 잘 마르고 있습니다.

그 볍씨 속에 들어 있는 흰쌀,

우리 앞에 놓이는
정갈한 저녁 밥상과

흰 쌀밥 한 그릇도
일년 내내 못물에

발목을 적시며
준비한 것임을 생각합니다.

씨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일의 숭고함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 일의
순간순간에서 마지막까지
경건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가을 저녁 길이 환합니다.

문학집배원 도종환